짚풀문화 회생에 바친 후회없는 반평생 <2005. 3. 15>
2005. 06. 27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
||||||||
집착에 가까운 짚풀사랑 짚풀생활사박물관 인병선 관장이 반생을 바쳐 학문적으로 정리한 짚 문화는 대표적인 기층 서민의 문화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짚을 만지던 서민 출신이 아니라 짚에서 떨어진 알곡을 챙기던 지주의 딸임을 인정한다. 또 1935년 민족적 암흑기에 출생하여 이화여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수학한 그의 이력도 결코 서민적이진 않다.
사석에서 짚풀을 토론하던 지인들이 기자에게 던진 질문 중에 "그 사람(인 관장)은 왜 하필 짚풀에 관심을 가졌대?"가 많다. 그 질문 속엔 '서민 출신도 아니고 새끼를 꼴 줄도 모르면서 일종의 취미성 사치로 짚풀을 얘기하는 것 아니냐'는 짙은 의혹이 분명 깔려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취미요 사치로 짚풀에 덤볐다쳐도 그것에 젊음을 바친 정열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니다.
가슴 아린 기억을 건드려야 하는 부담감에 보충 취재를 위해 두 번째 찾아간 자리에서야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남편이자 위대한 민족시인인 신동엽 시인(1969년 작고)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한풀이처럼 짚풀사랑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냐고, 북으로 가셔야만 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녹아 있는 것은 아니냐고. 인 관장은 크게 부인하진 않았다. 이승에서의 만남이 고작 10여년에 그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 군사정권의 칼에 의대본과 2학년에서 '잘린' 큰 아들 등 아픈 과거가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지는 순간, 어떤 쪽으로든 강인한 이미지로만 인식되던 인간 인병선의 붉은 눈시울을 보면서 못 본 척 고개를 돌려야 했다. 일에 묻혀 잊고 살아온 세월이지만 이젠 그의 나이도 회한이 더 많을 70이다. 인병선 관장은 짚을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짚을 만지며 짚의 냄새를 맡는 것을 아픈 기억의 피난처로 생각하는 것도 같다. "짚으로 못하는 것이 없고 안하는 것이 없었다" 짚을 문화형의 하나로 보려는 시각조차 없었을 때부터 그는 '짚에 미쳐서' 돌아다녔다. 새마을 운동의 불길이 곳곳의 짚을 태워버릴 때, 그는 해체되고 태워지는 짚과 풀로 이뤄진 전래의 구조물과 도구들을 사진으로 남기느라 전국을 헤맸다. 그럼에도 짚풀을 전통공예로 보는 것을 썩 흡족해 하지 않는 것이 많이 의아했으나, 짚문화가 근본적으로 서민의 몫이었으며 다음해 농사를 위한 필수 과정이었고 농한기의 시간 때우기 손놀림이 아닌 서민의 고단한 노동문화였다는 인 관장의 말을 들으면서, 짚풀을 공예로 바라보기를 조심스러워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추수가 끝나고 다시 봄이 올 때까지 새끼를 꼬고 멍석을 엮고 가마니를 짜고 짚자리를 매는 것은 농한기여서가 아니었다고 강조하는 그는, 공예로서의 짚 문화보다는 다듬어져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재료와 기구로서의 짚 문화에 애착을 가진다며, 가마니, 짚신, 멍석, 삼태기 등 모든 짚 기구 제작의 출발과 목적이 "실용성"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사실 전통적 짚 기구들은 거의 다음 농사를 위한 필수 준비과정이었다. "짚으로 못하는 것이 없고 안하는 것이 없었다"는 인 관장의 말은 짚 문화의 유용성을 정리하는 간결 정확한 말일 것이다. 세련된 짚풀 공예품이 나오고 그런 공예품들이 고유문화의 한 상징으로 인식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예품으로서의 짚 기물은 짚풀 문화의 원천은 아닌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인 관장의 주장이다. 짚 기물의 실용 기능은 거의 사라진 지금도 인테리어 소재 등으로 짚 기구가 널리 활용될 것에 그는 여전히 희망을 가진다. 그의 박물관에서 상설 운영하는 짚 문화 체험 프로그램에 자녀를 데려오는 신청자가 꾸준히 몰리며, 어린 세대들이 매우 재밌게 짚 문화를 접하는 것도 그에겐 큰 기쁨이다. 중요한 고유문화의 세대 전달을 이뤄낸 보람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그는 현대 물질문명의 비인간성을 "닭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닭고기를 키우는 양계장"의 비유로 상징했다. 낳은 알은 바로 뺏기고 좁은 우리 안에서 많은 산란이나 속성 비육만을 강요당하는 닭의 모습은 현대의 우리들 모습과 같지 않느냐며, 짚을 만지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큰 날개로 병아리를 품는 어미 닭의 마음을 느낀다 했다. 그러나 그는 많이 지쳐보였다. 지난 해 12월 한 모임에서 인 관장을 만났을 때, 그리고 기사를 위한 이번의 인터뷰 만남에서도 기자는 '이제 일을 좀 줄이시라'고 웃으며 권했지만, 인 관장은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말로 웃으며 답을 대신했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메고 사라져가는 짚 문화 현장을 기록해두려고 다닌 젊은 날의 '극성'이 허리디스크라는 훈장으로 남아 지금은 오래 걷기도 힘들지만, 그의 노력으로 사람들은 '짚풀'에 '문화'를 붙여 '짚풀 문화'라 거부감 없이 쓰게 되었다. 새끼줄 가마니짝이던 짚떼기들이 '짚풀문화'라는 점잖은 용어를 얻은 것만도 그에겐 뿌듯한 행복이다. 그가 모은 자료가 짚풀생활사박물관의 이름으로 1993년에 대중에게 선보인 것이 큰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살며 있는 것이다 인병선이 시인의 이름을 얻기까지는 남편이었던 고 신동엽 시인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가 쓴 '신동엽 생가'라는 짧은 시는 이런 구절로 맺는다.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인터뷰 내내 떠올랐던 이 시구가 기사를 마치면서도 또 떠오르는 것은 "살고 가는" 단절의 문화가 아니라 "살며 있는" 문화적 연속성의 전제 위에서 '인간 인병선'의 짚풀 문화 사랑이 태동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다.
놀라운 추진력으로 또 하나의 기념비적 역저를 탈고 중인 인병선 관장을 보며 떠오른 말은, 거창한 찬사의 말이 아닌 아주 평범한 말, 누구에게나 언제나 따뜻하고 그리운 단어 '엄마'였다. 짚풀이라는 잊힐 뻔한 '문화의 엄마'를 우리에게 안내한 그를, 이 땅 '짚풀문화의 대모'라 부르고 싶다. 그는 한사코 '대모'라는 단어를 사양했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