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본 평양 사람들 (2) <2005. 6. 23>
2005.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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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테이블 두 남자
이 간단하고 평범한 사진은 분단 50년이 넘으면서 두 나라처럼 굳어진 남과 북의 정신적 사회적 거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다시금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왼쪽의 남자는 적절히 웃음을 짓고 두 팔도 편안히 겹쳐 테이블 위에 얹고 있다. 그러나 오른쪽의 남자는 주어진 임무(?) 외엔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듯 불끈 쥔 주먹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표정이 굳다. 그는 정말 불끈 쥔 주먹과 굳은 표정처럼 무서운 사람일까. 그가 정말 테이블 분위기에 무감각했고 사람다운 정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마 오른쪽의 무표정한 안내원도 임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서 또는 식구들에게는 자기 속내를 툴툴 털었으리라. 스타를 '실물'로 본 우리 사회 보통 사람들처럼, 본 것에 살까지 붙여 '남쪽의 배우는 선녀더라'고 신나서 얘기했을지 모른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걸치는 회식 분위기에서는 직장 상사를 향한 험담도 고만고만한 애교로 들리듯, 그도 북쪽 사회에서 고만고만한 애교로 보는 수준에서 호기있게 살을 덧붙여서 이 자리를 얘기했을 것이다. 다양성에 능한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다양성에 익숙한 우리가 경직될 수밖에 없는 북쪽의 사람들을 먼저 이해해줘야 한다. 우리(남측 방문객)는 그저 며칠 다녀올 뿐이지만 그들은 그 사회 속에서 먹고 자며 매일매일 살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판단하며 '저들은 왜 저렇지?'하는 것은 어거지다. 북측 공연단이 처음 남쪽에 왔을 때 사회자의 출연자 소개 멘트는 그 자체가 단연 화젯거리였고 개그맨들은 흉내도 냈다. 그러나 그 이후 그런 장면을 많이 본 것도 아닌데 이젠 우리도 그런 북한식 사회 멘트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만났었다'는 사실은 이렇게 무섭다. 왼쪽 안내원이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표정을 지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는 인병선씨가 행사 내내 타고 다닌 버스의 안내원이었던 것. 불과 이틀의 만남으로 표정이 맨 오른쪽에서 맨 왼쪽으로 바뀐 것이다. 왼쪽 안내원의 역할이 현장의 테이블 안내원이었다면 아마 그의 표정도 장담 못하리라. '만났던 사람'이라는 것은 남에서나 북에서나 이렇게도 큰 '빽'이다. 6자회담, 체제인정, 군비축소 등등이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자주 만나는 일'이다. 자주 만나서 정을 터놓는 것은 어떤 조약이나 협정보다 큰 힘으로 남북의 벽을 허물 것이다. '만났던 사람'이 남과 북에 서로 많아질 때, 체제가 빚은 오해는 그 다음 일이 될 것이다. 뺑덕어미가 순화 교육을 백번 받아 봐도 심청의 속내를 따라가기 힘들 듯,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이 우리 민족의 가슴 절절함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북쪽 체제에 순응해야하 '인민'들을 이해해줘야 한다. 또 북의 처사에 국민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다양성을 북측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 자주 만나야 한다.
시골가게에 가서 선택의 여지가 없음에 불만스러워하지 않듯이, 우리는 북쪽이 현재 사는 그 모습 그대로 보아주어야 한다. 많든 적든 배급이 필수 생활 물자 조달의 주요 방편인 사회에서 상점은 물자 조달의 보조수단이다. 북쪽의 소비물자 생산 수준은 낮은 편이다. 당연히 상점에 물건은 다양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도 적을 것이다. 단순 비교 대상으로 북쪽을 보는 한 남북 간 마음의 거리는 자꾸 멀어진다. 그냥 보이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보자.
일상적인 서울 거리 모습을 본 북쪽 사람들은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아 무슨 일이 났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모든 북한 풍경을 우리 식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싫건 좋건 가족이 선택의 대상이 아니듯이, 크게 보아서 남과 북은 서로 가족이다. 언제까지나 호의적이진 않을 주변 열강의 숲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할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가족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인병선씨는 기자에게 이런 독백을 전했다. 지금까지 저는 나라가 반토막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다녀오고부터는 제 실존(實存) 자체가 반토막임을 알았습니다. 반토막 삶의 의미가 새삼 혼란스럽습니다. 가슴 한복판이 뜨겁고 그것이 치밀어올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인병선의 반토막은 실향민 인변선만의 반토막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반토막이기도 하며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시대의 아픔이다. 그 반토막이 다시 또 한 세대를 이어간다면 그것은 그대로 비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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