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따라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다. <오마이뉴스, 2005.9.6>

2005. 1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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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301호 궁남지
ⓒ2005 안병기


만수산 무량사에서 돌아오던 발길을 부여에서 멈춘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사적 135호 궁남지였다. 속칭 '마래방죽'으로 불리는 곳이다. 1965∼1967년 사이에 실시되었던 복원 공사 이전까지만 해도 자연적인 저습지로밖에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무왕 35년조에 보면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연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 왕궁지의 남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연못의 이름을 궁남지라 부르는 것이다. 현재 복원된 궁남지는 본래 크기인 3만여 평에서 크게 축소된 규모로 1965년 정비작업을 했으며 다리와 누각은 1971년에 지었다.



궁남지 옆으로는 최근에 조성된 방대한 연꽃 방죽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었다. 막바지에 이른 연꽃들이 피워내는 해맑은 미소가 아름답긴 했지만 연꽃 방죽이 너무 넓어 궁남지가 오히려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고 산만한 느낌도 드는 건 문제였다.



▲ 궁남지 초입에 서 있는 서동요비. 주변이 너무 간결해서 어떤 종류의 상상력도 허락하지 않는다.
ⓒ2005 안병기


궁남지 옆에 있는 서동요비는 말끔하게 단장돼 있었다. 7년 전만 해도 노래비 주변에 산다화도 피어 있고 잡초도 우거져 마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떠올릴 만한 공간이었으나 이 말끔하게 다듬어진 공간에서 무슨 옛 이야기를 떠올릴 것인가. 말끔하게 단장된 유적들은 우리에게서 이렇게 역사적 상상력을 앗아가 맨송맨송하게 만들어 버린다.



궁남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민족시인 신동엽의 생가가 있다. 시간상 시비가 서 있는 백마강 기슭 백제나성 자리에 세워져 있는 신동엽 시비는 둘러보지 못하고 시내 복판 동남리에 있는 생가에만 들르기로 한다.



▲ 신동엽 시인 생가 대문
ⓒ2005 안병기


▲ 신동엽 시인의 생가
ⓒ2005 안병기


정감있게 다가오지 않는 시인의 생가



한때 남의 소유가 되었던 것을 미망인 인병선 여사가 다시 사들여 옛날의 모습을 찾아 놓았다. 복원 당시는 신동엽 시인이 살던 때 그대로 초가집이었지만 지금은 새뜩한 기와집이다.



군청에서는 이엉을 새로 해 이어야 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김유정 생가나 정지용 생가의 경우와 견주면 그리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지난 4월 김유정문학제에 갔을 적에 김유정 생가는 초가지붕 잇는 날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로 열고 있다는 말을 관계자에게서 들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한양대 음대 이종구가 신동엽 시에다 곡을 붙이고 이정지가 부르는 노래 '초가을'을 가만히 불러본다.



그녀는 안다 이 서러운 가을

무엇하러 반도의 지붕밑, 또 오는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진 궤상(机上) 앞

초가을 금풍(金風)이 살며시 선보일 때

그녀의 등허리선

풀 멕인 광목날 앉아 있었다.

아, 어느새 이 가을은 그녀의 마음 안 들여다보았는가.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

그녀는 안다 이 빛나는 가을

무엇하러 반도의 지붕밑, 또 찾아 오는가…



노래 '초가을' 가사




신동엽 시 '초가을'의 어두운 서정이 대금 가락에 실려 가슴을 파고든다. 시인이 세상 떠난 지 45년이 흐른 지금 그가 그리던 '알맹이'만 남은 세상은 어디쯤 와 있을까.



문학이란 "영원한 괴로움이요, 영원한 부정이요, 영원한 모색이다"라고 했던 신동엽 시인. 역사란 모색하다가 날이 샌다. 북망산에 가면 날 새기 전에 죽은 자들의 무덤으로 넘쳐난다. 이 지지부진한 역사에 질려 희망을 버린 사람이 몇 몇인가.



신동엽 시인의 생가를 나와 오른 쪽에 있는 정림사지를 향했다. 1942년 정림사지 터를 발굴했을 때 '대평8년무진장림사대장당초'라고 정림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나왔다 한다. 대평 8년은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으로 그때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다는 것은 그렇게 확인된 셈이지만 백제 당시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국보 제 9호 정림사지 5층석탑
ⓒ2005 안병기


정림사 터 한 가운데는 망국의 설움을 온몸으로 견뎌낸 5층석탑이 서 있다. 기단은 1층 지붕돌에 비해 훨씬 좁은 단층이다. 면석의 모서리 기둥이 위로 갈수록 좁아져 목조기둥의 배흘림 수법을 취했다. 지붕돌은 얇고 평평한 판석이지만 처마를 살짝 치켜 올라가게 해 보는 바라보는 사람에게 경쾌한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1층 몸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대당평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이라 새겨넣은 자리가 있다.



▲ 보물 제 108호 정림사지 석불좌상
ⓒ2005 안병기
정림사지 북쪽 강당 자리에 있는 전각에는 석불좌상 한 분 모셔져 있다. 정림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와대로 고려 현종 때 절을 중수할 때 모셔진 듯하니 11세기 불상이다. 얼굴이나 몸체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모돼 있긴 하지만 아래쪽 대좌에 새겨진 안상이나 연꽃 조각만은 비교적 뚜렷하다.



부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낙화암이다. 낙화암으로 가려면 도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부소산성 길을 허위허위 올라간다. 역사의 고난을 호흡하기엔 너무나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간다.



백제의 충신들인 성충ㆍ흥수ㆍ계백장군의 넋을 기려 지은 삼충사를 지나 영일루를 거쳐서 군데군데 띠처럼 쌓아올린 토성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20여 분 정도 발품을 팔면 백마강을 낀 서북쪽 낙화암에 이르게 된다.



낙화암, 이 은유적인 이름은 뭔가



금강은 백마강 말고도 지역에 따라 백강, 창강, 곰강 등으로 불린다. 탁 트인 풍광과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이 어우러진 낙화암. 부소산의 북쪽 끝에 위치한 40~50m 높이의 암벽인 낙화암에 대해서 최초로 기록한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조에는 낙화암에 대해 다음같이 말한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 돌이밑으로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로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면서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것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속설이니 궁녀들만은 이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나라 역사에 명백히 쓰여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인 고려 충렬왕 때까지는 낙화암이 지금과 달리 타사암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지리지>에는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200년의 시간은 바위라는 무생물의 이름마저 직유법에서 은유법으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타사암이라면 몰라도 낙화암이란 서정적인 이름 앞에서 어떻게 역사의 통증을 맛볼 수 있단 말인가.



▲ 고란사
ⓒ2005 안병기


나라가 위태로울 때 계백장군은 겨우 5천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맞서 싸우다 죽음을 택했고, 궁녀들은 적에게 잡혀 능욕당하느니 차라리 낙화암에서 죽음을 택했다는 전설은 분명 비장하면서도 애국적인 장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 수가 유행가 가사처럼 3천이냐 아니면 몇 백이냐 따위의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숫자의 크기가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영역에 속한다



역사는 기록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역사는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해석하는 자의 영역에 속한다는 뜻이다. 역사를 너무 감상적으로 바라본다거나 미화하려 들어선 안 된다.



내가 이 '낙화암'의 전설에서 맡는 것은 케케묵은 국가주의의 냄새이며, 왕을 모시던 궁녀들이니 행여라도 적에게 능욕당해선 안된다는 '순결 이데올로기'의 냄새이다. 지배 권력의 시각에 맞춰 재단된 이런 이데올로기가 궁녀들을 집단자살로 몰고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낙화암 정상에는 지붕이 6각형인 정자 백화정이 있다. 백화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200여 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고사 직전에 놓인 고란초는 사람들의 손을 타지 못하도록 유리벽 속에 들어 있었다.



▲ 백화정에서 바라본 석양
ⓒ2005 안병기


▲ 산마루에 반쯤 걸린 태양이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왜 슬픈 것일까!
ⓒ2005 안병기


일몰, 그 장엄한 하루의 에필로그를 지켜보며



곧 장려한 해넘이가 시작될 시간이다. 일몰을 바라보기 위해 갔던 길을 황급히 되짚어 올라와 낙화암 정상에 있는 백화정으로 다시 올라온다.



보령 성주산 쪽으로 서서히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노을이 백마강 물결 위에다 무심코 제 붉은 마음 한 점을 떨어뜨린다. 강물이 점점 핏빛으로 붉어진다. 붉은 노을 속에는 비장한 선율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앵앵거리는 아쟁의 소리가 백마강가의 빈 하늘을 가득 채운다.



사비성이 함락 당했던 서기 660년 7월 13일. 그날의 황혼도 저렇게 장려했을까를 생각하는 동안 저녁 해는 산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황혼이 연주하던 아쟁의 줄 하나가 툭, 소리를 내며 끊어져 버리더니 별안간 주위가 칠흑으로 채워졌다.



황혼은 무덤이라는 말과 이음동의어이다. 오늘도 그 무덤에다 하루를 묻었다. 오늘은 황홀한 황혼의 하늘가에 하루를 묻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터덕터덕 부소산을 내려간다.



부여읍내 가득한 집들이 하나 둘 등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렇게 등불이 켜지듯 오늘 저녁 사람들의 마음에도 등불이 켜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