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앞에선 달콤했던 민족시인 - 국민일보 2006년 3월3일

2006.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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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4월은 갈아 엎는 달’ 등 나지막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시편들로 1960년대 한국 문단을 이끈 시인 신동엽(1930∼1969)이 만년필로 꾹꾹 눌러 쓴 사랑의 편지가 미망인 인병선(71·짚풀생활사박물관장)씨에 의해 2일 공개됐다.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마음에 들지 않아 날마다 두세 차례씩 써선 버렸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언 오늘이 나흘째. 막상 봉투에 접어 놓고 봉을 할랴치면 쓴 내용이 하나도 마음에 차지 않아 도로 꺼내서 한 가닥 찢어버리곤 하게 됩니다.”(1954년 5월12일)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던 1953년부터 주고 받은 연서(戀書)들은 휴대전화 메시지와 인터넷 이메일 등 정감이 사라져버린 전자통신 시대의 교신 풍조에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시인이 작고한 지 올해로 37년. 그가 남긴 편지와 봉투는 긴 세월 빛이 바랬지만 거기 적힌 지고한 열정의 언어는 바로 어제 쓴 글씨처럼 꿈틀대고 있다.

“추경에게! 아름다운 아츰이었읍니다. 이렇게 똑똑한 일기가 추경 계신 서울에도 베풀어졌기를 바랍니다. 도시 생활 반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라서 그런지 주인 없는 친구집이나 간 것처럼 서먹서먹하기 짝이 없어 처음날엔 되짚어 돌아가고 싶은 생각마저 간절했습니다.”(1954년 1월22일)

“석림! 제 가슴이 아니고는 세상이 구해질 것 같지 않아요. 그것만은 석림의 가슴도 또 누구의 손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신에 대한 자신을 가지고 있어요.(1954년 3월7일)

석림과 추경은 각각 신동엽과 인병선의 아호. 인씨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도 어렵던 시절이라 아호를 정해 부르곤 했다”며 “휴대전화 문자로 소식을 전하고 있는 요즘 시대는 연애편지가 없는 세상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1953년 말,전주사범을 졸업한 신동엽은 친구의 도움으로 서울 돈암동네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게를 세내 헌책방을 차린다. 그때 책방을 서성거리던 인병선은 동국대 교수를 지내다 6·25 때 납북된 농촌 경제학의 권위자 인정식의 딸로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다. “우리 집이 그 책방 근처여서 자주 들렀어요. 제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잡지들을 사니까 유심히 쳐다보더라고요. 목까지 여민 군인 잠바에 큰 눈 밖에 보이지 않는 그분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체온이 제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지요.”

신동엽이 결혼 직전 추경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대표작인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한 구절을 연상케 한다. 연애의 감정은 훗날 문학의 언어로 치환돼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편을 낳았다. “하늘이 보이오. 투명한 하늘/밤송이 여물어 수수모감일 후두둘길/쪽빛 깊은 하늘/그곳 귀밑머리 옷자락 펄펄이 나부끼며 외로이 지나가는 나그네 하나”(1956년 8월29일)

인씨는 “연애편지가 갖는 매력은 대단한 것으로 제가 받은 편지는 전부 시였다”며 “사라져가는 편지 문화가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인씨는 소장하고 있는 엽서와 유고를 올해 신동엽문학관을 착공하는 충남 부여군에 기증하기에 앞서 도록 ‘시인 신동엽’(현암사)으로 묶었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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