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신동엽을 이젠 보내고 싶습니다." - <오마이뉴스,2006-03-10>

2006.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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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 현암사
지난 금요일(3일). 새벽까지 이런저런 자료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시인 신동엽> 출판기념회 소식을 알게 된 나는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지난해 10월 15일, 강원도 춘천의 한 모임에서 전율이 일 정도로 '껍데기는 가라'를 낭송하던 시인의 아내 인병선 선생의 모습과 20대 혈기 방자하던 시절 내 정신의 한 축을 틀어쥐었던 신동엽 선생(이하 신동엽)의 시어들이 겹쳐지면서 울컥했기 때문이다.

새벽 5시, 예의가 아님에도 나는 인병선 선생에게 전화를 드렸고 아침 일찍 찾아뵐 수 있었다. 한 잠도 못 잤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인병선 선생의 생생한 육성으로 50여년 전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 사랑, 이별, 그리고 세 아이와 함께 혼자 남겨진 한 여인이 겪은 질곡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시인 신동엽>의 책장을 끝까지 넘기고 난 뒤 나는 결국 눈물을 훔쳤다. 이 글은, 도록(圖錄) <시인 신동엽>에 대한 소개와 시인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3월 7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소식까지 묶은 스케치다.


"풋풋하던 고3 때 그이를 만났지요"

▲ 인병선(71) 선생
ⓒ 이동환
1969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시인 신동엽. 그동안 발간된 수많은 전집과 선집, 그리고 수백 편에 이르는 논문들이 그를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 시인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나 정작, 사람냄새 몰씬 풍기는 한 인간으로서 신동엽의 궤적을 엮어낸 책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 '현암사'에서 <시인 신동엽>을 펴냈다.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방대한 사진과 자료를 묶어낸 의미 있는 출간이다. 유물공개고증은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이며 시인의 아내인 인병선 선생이, 글은 그간 신동엽 시인을 연구해온 와세다 대학의 김응교 교수가 썼다.

인병선 : "이제 유물을 묶어 세상에 내놓으니 그를 아주 보낸다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보내고 저 또한 가고…. 그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시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의 시를 가리켜 어떤 분은 70·80년대 민족주의에 고착되어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지금도 살아있는 생명체로 우리 속에서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습니다(발간사에서)."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부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2대 독자였다. 집안이 워낙 가난해서 여동생이 네 명이나 죽어나갔다. 동엽은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그러나 워낙 똑똑해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소학교(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너무 가난한 나머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엽의 총기를 너무 아낀 담임선생 김종익씨 도움으로 전주사범학교에 입학(1945년)하게 된다. 김종익씨가 추천한 열다섯 명 가운데 합격한 사람은 동엽뿐이었다. 그는 <노자>와 <장자>를 옆구리에 항상 끼고 다녔다. 김소월 시집과 엘리엇 시집, 투르게네프 산문집, 그리고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에 빠져들었다. 아나키즘에 매료된 동엽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그 어느 쪽에도 쉽게 찬성하지 못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다.

인병선 : "시인의 생가가 금년부터 신동엽문학관으로 거듭납니다. 시인의 유물들을 기증하기 전에 책으로 묶어내고 싶었어요."

1953년 겨울에 동엽은 서울 돈암동 네거리, 선배가 운영하던 고서점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단발머리 소녀가 책방에 들어왔다. 철학과를 지망하고 있던 소녀는 철학계열의 전문서적을 찾고 있었다. 처음 방문은 아니었다. 동엽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는 애써 진정하며 소녀에게 다가가 굵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마음에 들지는 모르지만…, 이런 책은 어떨까요?"

인병선 : "고개를 돌려 책을 받아들며 처음으로 그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지요. 그전에도 여러 번 갔지만 그이를 바로 본 적은 없어요. 그이의 눈을 본 순간 그 눈빛에 운명처럼 빠져들고 말았어요. 그때 저는 이화여고 3학년이었지요. 내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이 그렇게 시작됐답니다(웃음)."

▲ 1954년 1월 22일, 석림(신동엽)이 추경(인병선)에게 보낸 편지 일부.
ⓒ 인병선
▲ 1954년 3월 7일. 추경이 석림에게 보낸 편지 일부. 편지 말미 '더 쓸 수 없어요' 하는 문구에서 구구절절한 사랑이 가슴 시리도록 느껴진다.
ⓒ 인병선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보면 동엽은 단아하고 총기 넘치는 소녀를 가슴놀이가 타들어가도록 사랑한 듯 보인다. 젊은 시인을 향한 소녀의 사랑 역시 숙명이었다.

인병선 : "진학에 대한 기쁨도 새로운 학문에 대한 정열도 나에겐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온통 그에게만 심취해 있었다(여성동아 1970년 12월호)."

연애시절 왼쪽 : 금강을 뒤로하고. 오른쪽 : 군복무 시절 부여 부소산에 올라.
ⓒ 인병선
1957년.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었고 그해 맏딸 정섭을 낳았다. 결혼하면서 인병선 선생은 대학을 중퇴하게 되었다. 결혼은 현실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가난했던 동엽은 결혼 당시 마땅한 직업도 없었다. 주변에서는 서울대까지 다닌 여자가 무엇 때문에 그런 결혼을 했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 열병인지 잊어버린 사람들의 허튼소리일 뿐.

▲ 왼쪽 : 코스모스를 좋아했던 신동엽. 오른쪽 : 전통혼례식을 막 마치고.
ⓒ 인병선

"이제 그이는 제게 있어 동지일 뿐이에요"

1969년 4월7일. 시인 신동엽은 사랑하는 아내와 세 남매를 세상에 남겨둔 채 간암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명성여고 국어선생이기도 했던 신동엽은 장례식에서 그가 가르친 학생이 눈물범벅이 되어 낭송한 자신의 서사시 <금강> 7장을 차디찬 널 위에 누워 들어야 했다. 인병선 선생의 가슴은 이미 무너진 뒤였다.

여행을 떠나듯
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

이미 끝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인병선 : "충격이 너무 컸어요. 세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저는 그이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대학까지 포기하면서 그이에게 모든 것을 다 걸었는데…, 처음으로 원망도 했지요. 대학이라도 졸업하게 내버려뒀다면 학교선생이라도 하며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눈물보다 한숨이 먼저 나오더군요. 입술을 깨물며 맹세했습니다. 다시는 남자에게 내 인생을 걸지 않겠다고요."

<시인 신동엽>은 단숨에 넘겨지는 책이다. 신동엽 연구가이기도 한 김응교 교수의 맛깔스러운 글도 글이지만 시인의 유년기부터 사후까지, 귀하디귀한 자료가 담뿍 담겨있기 때문이다. 224쪽에 이르지만 한 장 걸러 한 장씩일 만큼 풍부하게 사진이 실려 있다. 치열하게 살았던 한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야말로 시인의 냄새와 숨소리까지 옹글게 묻어난다.

인병선 :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이후 삶이 고독하지 않았냐고요? 생각해보세요. 그럴 틈이 있었겠어요? 여자 혼자 몸으로 세 아이 키우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답니다. 어떻게든 살아내는 일이 우선이었어요. 출판사에도 다니고 이런 일 저런 일…, 엄부자모 역을 혼자 해야 했기에 독한 맘먹고 살았지요. 그이를 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엄부 대역은 그런대로 한 것 같은데 자모 역할은 잘 못한 듯도 싶군요(웃음)."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병선 선생은 무진 애를 썼다. 그러다가 무지렁이로 천대받던 우리네 백성들의 전통, 짚풀문화를 만나게 되었다.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인병선 선생은 짚풀문화와 관련한 자료수집과 연구로 짚풀문화가로서 입지를 세우게 되었다.

인병선 : "짚풀문화를 만난 게 저로서는 참 행운이었습니다. 제 시집도 출간한 적이 있지만 그때 더욱 남편의 그늘과 제 한계를 깨달았지요. 시인으로서 신동엽은 타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이가 떠난 지 벌써 37년이 됐는데 아직도 저를 시인 신동엽의 아내로만 부른답니다. 그이는 그이고 인병선은 인병선인데 말이죠. 이 책을 통해서, 또 신동엽문학관에 모든 유물을 내놓으며 그이를 아주 보내고 싶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부인에게 남긴 부채 즉, 세 아이는 오롯이 인병선 선생 혼자 키웠다. 세월 따라 지천명에 이른 맏딸 신정섭씨는 서울대학교 미대와 독일 카셀대학을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다 캐나다에 이민 가 살고 있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인병선 선생 애간장을 태웠던 큰아들 신좌섭씨는 30대 중반에 복학해 졸업했고 지금은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둘째 아들 신우섭씨는 광운대를 졸업하고 사업가가 됐다.

인병선 : "이제 그이는 제게 있어 동지일 뿐이에요. 그동안 가족들이 끌어안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놓으면서 시인 신동엽을 대중 속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력이 될 때까지 짚풀문화가로서 열심을 다 할 겁니다. 이제 저를…, 시인 신동엽의 아내가 아니라 짚풀문화가 인병선으로 불러주세요. 물론, 벗어나고 싶다고 해서 그이의 그늘을 완전히 떨쳐낼 수야 없겠지만요(웃음)."

<시인 신동엽> 출판기념회 스케치

▲ 출판기념회 이모저모. 아래, 단상에 선 인병선 선생과 소설가 방현석씨.

3월 7일(화) 6시 30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도록 <시인 신동엽>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기념회도 기념회지만, 시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수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참석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시인 고은, 신경림 선생을 비롯해 고인을 추억하는 많은 분들의 소회가 이어졌다.

단상에 선 인병선 선생은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 긴장된 모습이었다.

"가족으로서 주관하는 시인과 관련한 행사는 이게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아직도 부여에 가서 택시를 타고 신동엽 생가에 가자고 하면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책 출간을 계기로 시인이 대중 속에 깊이 자리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중략). 오늘…, 이상하게 떨리네요. 너무 많은 분들이 오셔서 그런가요(웃음)?"

그랬다. 인병선 선생의 목소리는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긴긴 세월 가슴에 묻어두었던 추억과 고뇌, 그리고 미망인으로서 업보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질곡의 세월이 한꺼번에 번졌기 때문일 터.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인병선 선생의 따뜻한 손이 내 손을 잡는다. 순간, 이제는 짚풀문화가 인병선으로 기억해달라는 인터뷰 때의 마지막 말씀이 떠올랐다. 신동엽문학관이 건립되고 그 이후까지, 시인의 영원한 동지로 그저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