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시대를 깨우던 그의 쩡쩡한 목소리가 그립다

2007. 10. 18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fiogf49gjkf0d

잠든 시대를 깨우던 그의 쩡쩡한 목소리가 그립다
부여 궁남지와 신동엽 생가
▲ 부여 궁남지.
ⓒ 안병기

백제 무왕의 탄생 설화의 태실 궁남지

9일 국립 부여박물관을 나와 박물관 남쪽 방향에 있는 궁남지로 향한다. 작년 7월 중순 서동 연꽃 축제 때 이곳을 다녀갔으니 거의 1년 만의 일이다. 사적 135호 궁남지는 속칭 '마래방죽'으로 불리던 곳이다. 마동이라 불리던 백제무왕이 이 세상에 왔던(태어났던) 곳이란 뜻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무왕 35년조에는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연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궁남지라는 이름은 백제 왕궁지의 남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5∼1967년 사이에 실시되었던 복원 공사 이전만 해도 이곳은 자연적인 저습지로밖에 알려지지 않았던 한적한 곳이었다.

▲ 궁남지 중앙에 위치한 정자 <포룡정>
ⓒ 안병기
<삼국유사> 권2에는 백제 제30대 무왕의 탄생설화가 기록돼 있다.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연못가에다 집을 짓고 홀로 살던 중 못 속의 용과 통교하여 그를 낳았다.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그가 마를 캐어 팔아 생계를 이었으므로 맛동이라 했다. 한자로 바꾸면 서동이다.

현재의 궁남지는 본래 크기인 3만여 평에서 크게 축소된 규모이다. 1965년 정비작업을 했으며 다리와 정자는 1971년에 지었다. <포룡정>이란 정자 이름은 무왕의 탄생설화에서 빌어온 것이다.

갑자기 무왕의 어머니의 잠을 깨웠던 용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무왕의 어머니는 왜 연못가에다 집을 짓고 살았을까. 이곳에 오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용을 후리기 위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이사였던가. 난 후자에 더 무게를 둔다. 어쩌면 무왕이 선화공주를 꼬여내던 수법은 모전자전으로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능수버들이 하늘거리는 한낮의 궁남지는 한가하면서도 평화롭다. 정자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평화에다 화룡점정을 찍는다, 아무도 없다면 저 정자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낮잠이나 한숨 늘어지게 자고 싶구나. 그러나 이 평화는 한시적인 것이다. 이제 7월 중순 연꽃이 피어나고 축제가 열리면 이곳은 왁자지껄한 난장이 될 것이다,

▲ 여인이 연밭을 바라보고 있다.
ⓒ 안병기
궁남지 주변은 2000년부터 식재한 연과 야생화로 가득차 있다. 2만5천여평이나 되는 방대한 면적이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을 실감케 해주는 풍경이다. 궁남지 주변 연꽃은 아직 피어나지 않고 있다.

방죽 사잇길에는 한 여인이 앉아 연을 바라보고 있다. 연꽃이 필 날을 기다리는 걸까. 저 여인은 기다림 자체가 가장 생생한 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기다림이 생의 허무를 견디게 해주는 가장 큰 힘 가운데 하나라는 걸 알까.

원초적 상상력을 앗아버린 주변 환경

▲ 궁남지 동쪽에 위치한 화지산.
ⓒ 안병기
▲ 화지산 자락에 세워진 서동요비.
ⓒ 안병기
궁남지 들머리에는 마동설화를 새겨놓은 비가 있다. 주변이 너무 깨끗하게 정리돼 있다. 십여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엔 산다화와 다북쑥과 잡초 등이 우거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말끔한 곳에서 어떻게 서동과 선화공주가 일으켰던 얼레리하고 꼴레리했던 설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까.

깨어진 설화를 되살리기 위해 서동요비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화지산을 바라본다. 1300여년 전 서동과 선화공주는 저 화지산에 앉아 부소산 서쪽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을까.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遺去如
서동 방으로 밤에 몰래 품으려고 간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서라벌로 온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환심을 산다. 서동은 아이들에게 자기가 지은 노래를 부르며 서라벌의 고샅을 누비게 한다.

마침내 궁궐에까지 이 노래가 알려지고 딸의 정숙하지 못한 행동에 격노한 왕은 공주를 귀양 보낸다. 귀양 길을 떠나는 선화공주를 따라가며 마동은 뜻하는 대로 공주와 은밀한 관계를 맺는다. 서동이 공주를 꼬시는 수법은 어미를 닮은 것이고 '밤에 몰래 품으려고 가'는 것은 그의 아비인 용의 수법을 닮은 것이다. 세상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식이란 없다.

공주를 얻으려고 멀리 적국에까지 침투해 들어간 마동의 전략이 돋보이는 설화다. 삼국시대는 의외로 평민과 공주의 결혼 등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혼인이 가능했던 자유로운 시대였던가 보다.

시골 여자와 결혼한 고구려 산상왕, 온달과 결혼한 평강공주, 마동과 결혼한 선화공주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가 당도해야 할 민주주의의 종착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높낮이 없는 세상이다. 오늘의 혼인 풍속보다 삼국시대의 혼인 풍속이 오히려 더 진보적이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 걸까. 우리가 가야할 민주주의로 향한 길이 아직은 요원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다시 신동엽 시인을 그리며

▲ 신동엽 시인 생가.
ⓒ 안병기
▲ 생가 좌측에 위치한 헛간채.
ⓒ 안병기
궁남지를 떠나 민족시인 신동엽 시인의 생가로 향한다. 시인은 부여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부여라는 도시의 이름은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부여는 아직 동터오는 새벽을 맞지 못했다. 부여는 3, 40년 전과 견주어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한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탓일까. 아니면 부여 사람들이 오랜 세월 일편단심으로 정을 주었던 노정객의 무관심 탓인가. 외지 사람이 보는 부여는 운치있고 아름다운 고도가 아니라 나날이 낡아가는 을씨년스런 도시이다.

그나마 이 도시의 퇴락을 막고 있는 것은 한 시인의 힘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태어난 민족시인 신동엽이 가진 정신의 힘이 없었다면, 그 주옥같은 시편들이 없었다면 부여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노인의 해소 기침 소리 같은 것뿐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생가는 언제와도 한적하고 쓸쓸하다. 한때 남의 소유가 되었던 것을 부인 인병선 여사가 다시 사들여 옛날의 모습을 찾아 놓은 것이다. 복원 당시에는 신동엽 시인이 살던 때 그대로 초가집이었지만 지금은 아주 새뜻한 기와집이다. 아마도 초가지붕 잇기가 번거로워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번거로움만을 따진다면 문화가 들어설 자리가 어디 있는가. 참고로 김유정 생가는 지붕잇기를 지역민의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세계화는 한편의 '팜므파탈' 영화이다

▲ 방 문 위에 걸린 인병선 여사의 목각 시.
ⓒ 안병기
껍데기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껍데기인 줄을 모르고 사는 삶이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그는 누구보다 먼저 우리네 삶을 덮고 있는 껍데기에 주목했다. 4.19의 껍데기, 동학혁명의 껍데기와 한반도를 덮고 있는 '쇠붙이'에 주목했다. 마침내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마치 주장자를 든 선사처럼 외쳤다.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시대를 관통할 줄 아는 밝은 눈을 가진 예언자였다.

나는 잠시 쪽마루에 앉아 시인의 삶과 시를 떠올린다. 내가 오늘 떠올리는 그의 시는 '껍데기는 가라'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니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도 아니다. 1967년 <동서춘추> 6월호에 실렸던 '종로5가'라는 시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후략)

-신동엽 시 '종로5가' 일부


'노동으로 지친' 시 속 화자는 무작정 상경한 것으로 보이는 소년과의 우연한 부딪침을 갖는다. 그리고 그 소년의 모습을 통해 창녀나 공사장 인부로 전락한 1960년대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은 소년의 누이이거나 아버지다. 농촌의 해체가 가정의 해체로 이어진 것이다. 흙묻은 고구마를 등에 걸머진 소년. 노동자의 홍수 속으로 금세 사라지는 소년을 통해 시인은 해체된 민족적 삶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가 보여주는 풍경은 지나버린 옛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걸까. 대답부터 먼저 말한다면 '아니올시다'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화의 물결 속에 휩쓸려 가고 있다. '세계화'라는 말을 바꿔서 말한다면 '당신들의 민족적 삶의 원형을 버리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버렸는데도 거대자본 내지는 자신의 발아래 거대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국가들은 더 버리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세계화의 끝은 내 알맹이를 버리고 남의 껍데기를 둘러쓰는 것이 될 것이다. 강대국과 맺는 FTA들은 민족적 삶의 원형을 완전히 붕괴시킬 것이고 마지막엔 가정의 해체까지 덤으로 안겨줄 것이다.

신동엽 시 '종로5가'가 보여주는 세계는 결코 40년 전의 과거가 아니다.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한 예고편이다. 내가 보는 세계화는 '팜므파탈'이다. 그 허울좋은 미명은, 그 매혹적인 여인은 우리의 농촌을 유혹해서 끝내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끔찍한 내용으로 가득한 본 영화를 보게 되리라.

오후 4시 반. 시인의 집을 떠날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방문 위에 붙어있는 인병선 여사의 시를 읽어본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서서히 부여를 떠난다. 지나가는 길가 여기저기에 수박을 파는 봉고가 서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부여는 수박을 특산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갑자기 고은 시인의 '투망'이란 시의 끝부분이 떠오른다.

한반도여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내 오징어를 팔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