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박물관에 대한 편견 깨고싶었다.`2008.12.20 경향신문
2008.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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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신동엽 시인 부인 … 짚풀생활사박물관 비영리재단으로 내놔
짚풀생활사박물관 인병선 관장(73)이 최근 자신의 박물관을 비영리공익재단 ‘짚풀문화재단’으로 만들었다. “평생을 바쳐 미친 듯이 모았다”는 수집품들에 대한 개인권리를 모두 포기하고 공공에 내놓은 것이다. 국내 기업박물관이 아닌 순수 개인의 사립박물관 250여곳 중 3번째 비영리재단화다.
19일 서울 명륜동 짚풀생활사박물관에서 만난 인 관장은 “사립박물관을 돈 많은 개인의 ‘여가선용 거리’ 정도로 바라보는 사회나 정부의 오해와 편견을 깨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 관장은 1993년 박물관을 열고 운영해 오면서 국내 박물관 문화의 척박한 환경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특히 사립박물관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이 그를 힘들게 했다.
“정부에선 사립박물관을 전적인 사적 소유로 보고 운영비·시설비 지원조차 하지 않고 있어요. 이게 정말 사적인 재산에 불과하다면 애써 수집한 걸 안방에 놓고 혼자 감상하지, 왜 어렵게 건물을 지어 공개하고 적자에 허덕이며 운영을 하겠습니까.”
비영리재단을 만든다는 건 그간 개인 소유였던 박물관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이 재단 소유로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다. 인 관장은 감정가 45억원의 개인 소유 건물 2채도 재단에 내놨다. 그의 세 자녀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5~6년간 깊이 고민했던 일인데도 막상 사재를 내놓으려니 그 끈을 놓아버리기가 힘들더라”고 고백했다.
특히 이번에 내놓은 건물 중 한 채는 그의 인생을 지탱해온, “남편과도 같은 존재”였다.
“남편인 신동엽 시인이 작고하고 10년 후에 친정어머니 유산과 제 돈을 털어 그 건물을 샀어요. 출판사에서 온몸이 퉁퉁 부어 가며 일한 돈이었죠. 덕분에 아이들 교육·유학시키고 박물관도 지을 수 있었던 건데….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막상 재단 이름으로 넘어간 집문서를 보니 마음이 착잡해지더라고요.”
그는 “어려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나이’ 때문”이라고 했다. “일흔이 넘다보니 덜컥 죽으면 어쩌나 생각했다”며 “승계할 자식이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땐 사회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내년은 남편 신동엽 시인의 40주기이기도 하다. 내년에는 충남 부여군에 기증한 생가 옆에 문학관도 지어진다.
“살아있어 물어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비영리재단화에 그이도 반대 안 했을 거예요. 나는 얼마 못 살지만 내 뜻과 이 재단은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하나의 욕심인가요?”(웃음)
<글 이로사·사진 강윤중기자 ro@kyunghyang.com>
짚풀생활사박물관 인병선 관장(73)이 최근 자신의 박물관을 비영리공익재단 ‘짚풀문화재단’으로 만들었다. “평생을 바쳐 미친 듯이 모았다”는 수집품들에 대한 개인권리를 모두 포기하고 공공에 내놓은 것이다. 국내 기업박물관이 아닌 순수 개인의 사립박물관 250여곳 중 3번째 비영리재단화다.
인 관장은 1993년 박물관을 열고 운영해 오면서 국내 박물관 문화의 척박한 환경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특히 사립박물관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이 그를 힘들게 했다.
“정부에선 사립박물관을 전적인 사적 소유로 보고 운영비·시설비 지원조차 하지 않고 있어요. 이게 정말 사적인 재산에 불과하다면 애써 수집한 걸 안방에 놓고 혼자 감상하지, 왜 어렵게 건물을 지어 공개하고 적자에 허덕이며 운영을 하겠습니까.”
비영리재단을 만든다는 건 그간 개인 소유였던 박물관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이 재단 소유로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다. 인 관장은 감정가 45억원의 개인 소유 건물 2채도 재단에 내놨다. 그의 세 자녀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5~6년간 깊이 고민했던 일인데도 막상 사재를 내놓으려니 그 끈을 놓아버리기가 힘들더라”고 고백했다.
특히 이번에 내놓은 건물 중 한 채는 그의 인생을 지탱해온, “남편과도 같은 존재”였다.
“남편인 신동엽 시인이 작고하고 10년 후에 친정어머니 유산과 제 돈을 털어 그 건물을 샀어요. 출판사에서 온몸이 퉁퉁 부어 가며 일한 돈이었죠. 덕분에 아이들 교육·유학시키고 박물관도 지을 수 있었던 건데….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막상 재단 이름으로 넘어간 집문서를 보니 마음이 착잡해지더라고요.”
그는 “어려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나이’ 때문”이라고 했다. “일흔이 넘다보니 덜컥 죽으면 어쩌나 생각했다”며 “승계할 자식이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땐 사회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내년은 남편 신동엽 시인의 40주기이기도 하다. 내년에는 충남 부여군에 기증한 생가 옆에 문학관도 지어진다.
“살아있어 물어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비영리재단화에 그이도 반대 안 했을 거예요. 나는 얼마 못 살지만 내 뜻과 이 재단은 오래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하나의 욕심인가요?”(웃음)
<글 이로사·사진 강윤중기자 r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