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의 속내 엿보다

2007.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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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의 속내 엿보다

'껍데기는 가라' 시인 신동엽 첫 유품전

나는 나를 죽였다
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
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소리를 내며 혀를
물어 내놓더라
그러나 또다시 죽여야 할 必要(필요)가 있어
비오는 날 새벽 솜바지 저고리를
입힌 채 나는 나의 虐待(학대) 받는 肉身(육신)을
江(강)가에로 내몰았다 - 신동엽 ‘낙서일기’(1953. 7.3.) 중에서
 
  

▲ 인병선 시인 신동엽 부인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

"시가 노래라는 사실은 그것이 한번 읽히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반복해서 읽혀야 한다는 장르적 숙명에 의해 검증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개인과 개인 간의 연대감이 줄고 시에 대한 집단적 공유가 사라지면서 시는 점점 노래를 잃게 됩니다." -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정희성 ‘모시는 글’ 몇 토막
   
시 '껍데기는 가라' '금강'으로 널리 알려진 신동엽 시인(1930-1969)의 육필원고 및 유품전 '신동엽의 노트를 열다'가 10월1일부터 11월4일까지 서울 종로구 짚풀생활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1일부터 일반인에게 선보이고 있는 200여 점 가량 되는 시인의 유품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

이 유품은 신동엽 시인의 아내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이 시인이 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 40여 년 가까이 꼼꼼하게 정리해온 소중한 물건들이다. 그중 시인의 학창시절 성적표와 임명장, 대학시절 읽은 책과 강의안, 옷가지, 담배파이프 등은 시인의 인간적 면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문화유산 같은 유품들이다.

시인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사진과 시인이 직접 펜을 꼭꼭 눌러쓴 육필원고도 눈길을 끈다. 노랗다 못해 갈빛을 머금고 있는, 오래 묵은 신문에 실린 시들에서는 시인 신동엽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노래와 가극이 된 시들에서는 시인의 목소리가 오선지를 타고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는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내가 본 건 먹구름 쇠창살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일생을 일생을 살아왔다
닦아라 사람들아
내 마음 속 구름과 구름과 쇠창살을 걷어라
아침 저넉 네 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혼의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항아리를 깨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알리라
불쌍함을 알리라" - 가극으로 공연된 '금강' 모두   

 

특히 연애시절 '석림'과 '추경'이라는 애칭으로 주고 받은 신동엽 시인과 인병선 관장의 편지와 엽서 등에서는 애틋한 사랑의 사연이 지금도 속살거리고 있는 듯하다. 시인 신동엽! 그는 무엇이 급해 그리도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훌쩍 버리고 말았을까.
       
1일 짚풀생활사박물관에서 만난 인병선 관장은 "시 '껍데기는 가라'가 그냥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라며 "시인이 남긴 육필원고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10대 때부터 '탈피'란 말을 참 좋아했고, 많이 썼어요. 아마 그때부터 '껍데기는 가라'란 시가 시인의 마음 속 깊숙이 꿈틀거리고 있었던가 봐요"라고 말했다.

인 관장은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육필원고와 유품들을 어떻게 보관할 것이냐는 물음에 "부여군에 건립 중인 신동엽 문학관이 준공되면 유품들은 모두 그곳으로 옮겨가게 된다"며 "아마 내년 중순쯤이 되어야 옮겨가게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1967 <52인시집>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모두

시인 신동엽은 누구?

 

  
▲ 신동엽 신동엽 시인의 모습
ⓒ 짚풀생활사박물관
 

시인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신연순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시인은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한다.

1948년 동맹휴학으로 학교가 잠시 쉬자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던 신동엽은 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는다. 하지만 시인은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 두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시인은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된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시인은 제1차 공군 학도간부후보생에 지원, 합격을 했으나 발령은 받지 못한다. 그 뒤 시인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는다. 그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연다.

신동엽 시인은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을 만난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시인은 고향으로 낙향한다. 이때 인병선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연다. 이와 함께 시인 또한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를 맡는다.

1958년 끝자락 시인은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 둔다. 이어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시인은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 입선된다.

1960년 시인은 마침내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는다. 1960년 시인은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든다. 1961년 시인은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일하며,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이수(1964)한다.

1969년 4월 7일 신동엽 시인은 안타깝게도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주검은 부여읍 능산리 고분 주변 야산에 묻혔다. 그 뒤 부여읍 백제대교 부근에 '산에 언덕에'란 시가 새겨진 신동엽 시비가 세워졌다.
 
시인이 남긴 책으로는 <삼월> <발> <껍데기는 가라> <4월은 갈아엎는 달> <주린 땅의 지도원리> <우리가 본 하늘> 등이 있다. 그밖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여자의 삶' 등이 있으며, <시인정신론> <시와 사상성> 등 평론 10여 편이 있다. 유작으로 통일을 기원하며 쓴 '술을 마시고 잔 어젯밤은' 이 있으며, 1975년 <신동엽 전집>이 나왔다.